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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20세기 한국소설3 - 전영택, 현진건, 나도향, 박종화

by 수레의산 2024. 3. 11.

1. 혜선의 사(死) - 전영택(창조 1호 1919.2)

    이혼은 절대 아니 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아깝게 죽은 여성 이야기. 하긴 1919년이면 조선 500여 년 계속된 관습에 목매이는게 당연할 듯하다. 하나 당시에 이혼이 막 시작되던 때이고, 소위 여학교에라도 다니는 , 상대적으로 조금 개화된 여성인데도 그렇게 꼭 막혀 있다는 게 안타깝다. 근데 이것도 100 여 년 전 전 일이니까 지금에서 확실히 고정관념이라고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떠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것은 없을까?  예를 들어 제사는 꼭 받들어야 하는 것이고, 정치는 정치인이 해야 하고, 노동자는 일해야 하고, 자본가는 자본을 굴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 100여 년 뒤에는 어떻게 변할까?

 

(줄거리)

    임혜선은 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과는 어떠한 정도 없다. 남편은 일본에 유학 갔다. 아무런 정도 없이 시댁에 얹혀사는 딸이 안타까워 딸을 여학교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다. 그녀는 방학 때가 되었으나 집에 가기도 썩 내키지 않고, 그렇다고 시집에 가는 것은 더군다나 가기 싫어서 기숙사에 머물고 있다. 그때 이종사촌 오빠가 찾아와서 이혼하는 것에 대하여 의견을 묻지만  남편과는 아무런 정도 없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반대한다. 그녀의 관념 속에 여성이 이혼한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러다가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성과 재혼하여 살고 있고, 그래서 자신과 이혼한다는 말을 듣고 자살을 한다. 

 

2. 화수분 - 전영택(조선문단 4호(1925.1)

   (줄거리)

    어느 날 화수분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아내와 딸 둘을 거닐고 필자의 행랑에 든다. 그는 행랑아범이라고 이름이 붙여졌고 나름 열심히 살고있다. 행랑어멈도 좀 모자라긴 해도 착하게 사는 여인이다. 어느날 딸 둘을 데리고 너무나 힘들게 사는 것을 이웃집 여자가 보고 큰딸을 다른집으로 보내도록 주선했고, 행랑어멈은 결국 딸을 보냈다. 행랑아범은 이 말을 듣고 밤새 울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행랑아범은 시골에 사는 형님이 발을 다쳐서 추수를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추수를 도와주러 갔는데 겨울이 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자 굶주림으로 기다리던 행랑어멈은 작은 딸을 데리고 추운 겨울에 남편을 찾으러 갔다. 한편 행랑아범은 추수일을 끝내고 부리나케 행랑어멈을 찾으러 돌아오다가 고갯마루에 행랑어멈이 작은딸을 품고 거의 동사지경에 이른 것을 발견한다. 그는 어쩌지 못하고 행랑어멈과 딸내미를 품고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보니 두 부부가 동사하였고, 그들 품에 부모의 온기를 받아 아이만 산채 꾸물 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허어~ 참, 슬프고 비참한 이야기다. 사람이 얼어 죽다니... 비참한 민초들이 생활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소설 속의 필자에게 더욱 분노가 치민다. 물론 자신들도 잘 살지는 못한다. 그들도 추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느질을 한다던가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 않은가? 만일 그들이 행랑어멈에게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이라도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인편을 놓아 행랑아범의 소식을 물어봐주었던들 그들이 그렇게 한겨울 고갯마루에서 얼어 죽었을까? 냉정한 사람들 같으니...  ㅠㅠ

 

3. 빈처 - 현진건(개벽 7호 1921.1)

    빈처는 고등학교 시절 입시에 단골문제로 나왔던 단편이다. 너무나 익숙하다. 한국 단편문학집에서 몇 번을 읽은 것이기도 하다. 평론에 보면 한국 근대사의 선편을 쥔 작품이라고 한다. 작가는 근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속물화된 세계를 비판하는 한편,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근데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겠다. 그저 빈처가 불쌍할 따름이고, 작가들이 과연 힘들구나,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등단하기 전에는, 더구나 1921년에는 소설을 읽을 수준이 되는 국민들도 적었던 시절이고, 앞선 소설가도 많지 않은 시절 아닌가? 그런 시절에 문학이라는 것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면서도 자존심만 내세우고 밥이 끓는지, 죽이 끓는지 내쳐두는 남자들의 세계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 여성들이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강인한가? 시집올 때 해온 옷을 하나씩 잡혀가면서 남편을 뒷바라지해주면서도 남편의 눈치를 보고, 또 남편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여인.... 아! 여인이여 그대는 강인하도다. 

 

4. 할머니의 죽음 - 현진건(백조 3호 1923.9)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거지 반 울음을 삼키며 시골집으로 찾아갔으나 할머니는 간당간당 하면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못하신다. 오히려 등창으로 등은 헐었는데 자꾸 일으켜 달라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몇 번씩 돌아가실 것 같다고 하여 가족들이 할머니 방에 모두 모였다가 또 그만하다고 하여 다른 방에서 대기하기를 열 며칠.... 처음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신다고 침통한 마음을 갖던 가족들은 이제 속으로는 얼른 돌아가시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끝에는 할머니가 스스로 일어나셔서 진지를 잡수신다. 그래서 모였던 가족들은 각자 생업지로 돌아간다. 필자도 집으로 돌아와 봄나들이를 나가려고 할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는다.  얼마나 허탈할까?  허~~~  과연 그렇겠다. 위기도 계속되면 에이 확! 벌어지지 하는 생각이 들겠지. 

 

5. 운수 좋은 날 - 현진건(계백 48호 1924.6)

    역시 일제 강점기의 비참한 민중의 삶을 그렸다. 인력거 꾼으로 하루 벌어, 아니 2~3일 벌어 하루 먹고사는 김첨지. 그 김첨지를 기다리며 홀로 외롭게 죽어간 그의 아내.  하필 아픈 아내가 일찍 들어오라는 날 운수가 기막히게 좋아서 돈을 꽤 많이 벌었고, 기분내서 대포도 마시고 동료에게도 한턱 내고, 마누라가 먹고 싶다는 설렁탕도도 한 그릇 사 왔는데, 아내는 이미 죽어서 말이 업다. 얼마나 슬픈 광경인가. 

 

    위정자들, 소위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배만 부르면 됐지 민초들이야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요즈음이라고 다를까? 아직도 생활고를 비관하며 자살하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하고 있지 아니한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던 22년에도 서울에 물난리가 나서 반지하 방에 거주하던 세입자 가족이 죽음을 당했다. 거기에 가서 장관이랑 밖에서 구경하면서 어쩌고저쩌고 하던 대통령과 장관들이 생각난다. 씨발놈들!

 

6. B사감과 러브레터 - 현진건(조선문단 5호 1925.2)

    겉으로는 협소하면서 기실 속마음은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는 위선. 못생긴 자신의 모습 때문에 연애 할 능력이 안 되는 것을 감추고 자신을 도덕적인 양 겉치레를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리워 1인 2역을 하는 노처녀.

 

   현대인들은 이보다 더한 1인 4역도 하지 않을까? 겉으로는 점잔을 빼면서 뒤로는 늙은 몸으로 젊은 여성들을 집으로 불러 매춘을 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어떤가? 비단 그 사람뿐일까? 또한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을 비롯한 검찰들은 자신들의 행위는 감추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만 캐기 위해 수백 군데 압수수색까지 벌이고 있지 않은가? 현대는 위선의 시대?

 

7. 고향 - 현진건(조선의 얼굴 1926)

    왜놈들이 들어와 역둔토를 모두 강탈해 동척에게 주고, 동척은 또 왜인에게 임대권을 주고, 조선사람들은 대대손손 농사짓어오던 땅을 빼앗기고 이중으로 토지세를 물게 되어 못살겠다고 간도로 갔지만, 간도라고 그렇게 만만할까?  거기는 또 먼저 간 사람들과 중국 놈들에게 수탈을 당하고, 밥 굶기를 밥 먹기보다 더 하게 하다가 연로하신 부모님과 아이들은 모두 죽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고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탁토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로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민들의 비참한 모습을 그렸다. 이런 이야기를 알면 감히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켜 발전이 되도록 했다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릴 수 있을까?

 

8. 벙어리 삼룡이 - 나도향(여명 1호 1925.7)

    우직한 벙어리, 자기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오직 주인집에 머물며 새서방으로부터 갖은 핍박을 당한다.  급기야는 새아씨를 흠모하는 것을 다른 마음을 갖고 있다는 오해를 받고 쫓겨난다. 그러다가 집에 큰 화재가 나고 벙어리는 주인을 구해서 밭 가운데 뉘어놓고, 새서방이 구해달라며 매달리는 것을 뿌리치고 새아씨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찾아서 구하지만 본인은 목숨을 잃는다. 그는 새아씨의 무릎에 뉘어서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죽는다. 

 

9. 뽕 -나도향(개벽 64호 1925.12)

    뽕은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그런데 영화로 나온 뽕의 여러 버전 중 원작과는 상당히 다르게 제작된 것도 많다.

    안현집의 서방 김삼보는 놀음꾼으로 전국 놀음판을 전전하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들른다. 생계는 거의 책임지지 않는다. 얼굴이 반반한 안현집은 결국 은근히 몸을 팔아 생계를 꾸려간다. 한 마을에 삼돌이라는 머슴이 있는데 힘이 장산데 왜 그런지 안현집은 삼돌이에게는 전혀 마음을 주지 않는다. ㅋ ㅋ ㅋ  예전에 집에서 잡종개를 키울 때 커다란 수컷이 오면 절대 꽁지를 내주지 않다가 발발이처럼 작은 수캐가 오면 꽁지를 내주어서 개주인들의 마음을 산란케 하는 경우가 많았듯이 똥개도 꽁지를 내주는 놈만 주고 절대로 주지 않는 놈도 있다. 이와 같이 안현집은 모두 주어도 삼돌이에게만은 매섭다.

 

    예전이 영화에서 이대근 배우가 그 역할을 했는데 정말 웃겼었다. 하여간 삼돌이는 앙심을 품고 김삼보가 왔을 때 고자질을 했지만 별로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고 오히려 김삼보가 대들다 그를 패대기쳐버렸다. 삼돌이에게 얻어터진 김삼보는 그 화풀이를 안현집에다 하고, 결국 둘이 대판 싸우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또 함께 밥을 먹고, 삼보는 또 옷을 갈아입고 놀음판으로 떠난다. 

 

10. 지형근 - 나도향(조선문단 1926.3)

    몰락 양반집(그의 아버지적에는  지주였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망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아들 지형근은 집안이 망해서 강원도 철원으로 노동을 하러 간다. 이는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여기에서도 어떤 친구가 어떻게 소식을 알려주었는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양반집 아들에게 그런 막노동판을 소개한다는 건 좀 맞지 않는 것 같다) 지형근은 가족과 동네사람들 모두와 작별을 하고 닷새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걸어갔다. 그런데 하루 정도 걷고 물집이 잡혀서 점점 걸음이 늦어지고 도중에 예전에 마름을 맡고 있던 사람의 집에서 하루 쉬어간다. 거기에서 마름이었던 사람이 자기에게 평대를 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란다.

 

    철원에 도착해서 도대체 정신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답답한 양반이다. 그러다가 사기꾼 같은 서 씨에게 이끌려 갖고 있던 옷을 팔고, 그 옷판 돈도 제가 챙기지 못하고 서씨에게 들려서 술집을 찾게 되고 거기에서 어렸을 때 이웃에 살았던 이화를 만나게 된다. 저도 아무것도 없어 막노동판에 노동하러 온 주제에 술집에서 일하는- 그녀의 기구한 삶의 여정을 듣고 난 이후에도-이화를 꾸짖는다. 속으로나 겉으로나. 참 허위의식에 쩐 인간이다.

 

    그러다가 개뿔도 없는 놈이 누가 20전을 달라니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냥 주고, 밥값도 없는 신세가 되어 그저 친구에게 얻어먹는다. 아무것도 없이 객지에 와서 토굴 같은데 모여서 자며 일하는 사람들을 봤으면 엄혹한 현실을 알만한데 답답한 인간은 아무 개념이 없다. 일자리는 친구가 계속 알아봐 주는데, 저는 할 일이 없어서 뒷산에 올라가서 이화를 생각하고, 이화를 보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정에 이끌리는 것도 아니고 주제에 여색을 생각나서 그러니 읽는 내가 답답해서 미치겠다.  결국 친구의 돈을 훔쳐서 이화의 술집에 가고, 술에 취해서 면서기와 다툼이 벌어지고, 돈을 훔친 대가로 경찰서에 붙잡혀 감옥생활을 하게 되며 끝이 난다.  아이고 답답한 양반아.

 

11. 목 매이는 여자 - 박종화(백조 3호 1923.9)

    사육신과 신숙주에 관한 역사소설이다. 박종화가 역사소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내용은 거의 세조가 단종을 밀어내면서 벌어지는 일을 신숙주의 부인, 윤 씨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소설에서는 충심을 저버리고 배신을 택하는 신숙주에게 실망해서 윤 씨 부인이 자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사실을 윤 씨 부인은 사육신의 거사가 있기 몇 달 전에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그 소설의 이야기는 이광수가 '단종애사'에 차용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