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12))
오늘은 일부러 느지막하게 출발한다. 어제 수퍼에서 '햇반 컵반' 이라는 것을 샀는데 이게 물만 부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 아니다. 전자레인지나 뜨거운 물을 붓고 끓여야 되는 것이다. 모텔에는 전자레인지가 없다. 안내인은 아직도 자는 것 같아 그냥 아침을 건너뛰기로 하고 일부러 늦게 출발!
신태인읍은 너무나도 쇠퇴해 가는 것 같았다. 일부는 경제가 전부 망해서 그렇다느니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아마도 고속열차가 생기면서 그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전에는 호남선이 분명히 여기에서 모두 정차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물류가 활발하고 인구들도 많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고속열차가 생겼다. 고속열차는 신태인에는 정차하지 않는다. 예전의 호남선 무궁화호는 익산-김제-신태인-정읍으로 어어졌지만 2015년 개통된 KTX는 익산-김제-정읍으로 이어지며 신태인은 빠졌다. 국도의 경우에도 우회도로가 생기면서 국도변에 있는 소도읍이 쇠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태인이 이 경우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신태인은 패스하고 익산이나 김제, 정읍 등 시단위 도시로만 유입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은 도시인 읍이 망하는 것은 필현적인 것이 아닐까? 문닫은 가계가 많고 현재 있는 건물도 횡하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만큼은 번성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커다란 건물은 교회건물이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카페집이 많다.
일단 701번 지방도를 이용한다. 지방도 역시 교통량은 한산하다. 고가도로 밑을 지나면서 신태인북길을 이용해서 돌아간다. 신태인북길변은 온통 쓰레기다. 특히 페트병등이 어지럽다. 1년에 한번만 청소해도 많이 깨긋해 질 텐데 아쉽다. 동남아권 나라에 가보면 이렇게 길에 비닐, 페트병이 널려 있는 것을 보면 답답했는데 우리나라에도 후미진 곳은 이렇게 쓰레기 천지다.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국토가 이래서야 되겠는지 답답하다.
그렇게 쓰레기만 보고 가다보니 마을 이름이 '상서마을'이다. 당초 계획했던 길을 지나왔다. 이번 국토종단을 하면서 세운 원칙이 있는데,
1. 가능하면 4차선 이상 국도는 걷지 않는다. 가능하면 농로등 작은 도로를 이용해서 국토종단을 한다.
2. 그리고 경로 주변에 있는 문화유적지는 가능하면 답사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종단만 한다면 그건 의미가 적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작은 길은 종종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할 수 없이 빙돌아 다시 원래 계획했던 부량로를 걷는다. 부량로를 잠시 걷고나지 본격적인 김제평야가 눈앞에 펼쳐진다. 끝없이 펼쳐진 평야. 그러나 미세먼지 탓으로 아름다운 지평선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이렇게 넓은 평야지대, 이렇게 넓은 논이 있는데 농부들은 한여름에 팥죽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도 제대로 먹고 살기가 어렵다면, 그리고 대대로 농사지어 먹던 땅을 하루아침에 빼앗긴다면 그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경로는 소승교를 앞에두고 수로변 도로를 이용한다. 나중에 보니 이 수로변에서 보았던 수문이 '장생거' 였다. 에이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후회해봐야 소요없고.. 계속해서 걷다보니 농어촌공사의 양수장비 시설이 있고, 좀 지나 뜰판 한가운데 '김제 별골제 유적' 이라는 가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현재 무슨 공사중인지 그렇다. 제대로 된 안내도 없고, 아마도 이곳이 벽골제가 있던 지역인데 그 기초가 되는 시설을 발군한 곳인가 보다. 끝없이 넓은 들에 쭉 뻗어있는 곧은길을 걸어 드디어 29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29번 국도 좌측으로 '아리랑문학관' 이 있고 오른쪽에 '김제 벽골제' 가 있다. 일단 문학관에 들러 예전에 읽은 '아리랑'을 되새기며 조정래 작가님의 능력에 다시한번 감탄해 본다. 아리랑에 보면 '죽산면' '징개맹게뜰' '군산'등이 나온다. 군산이 왜 커졌는지, 김제평야등이 있는 지역의 농민들이 왜 동학농민혁명을 했는지, 왜 일제에 크게 저항했느지 이유가 나온다.
맞은편에 있는 김제평야 축제 행사지와 함께 있는 벽골제 유적지를 돌아본다. 입장료가 3천원이다. 내생각에는 뭐 별로 볼것도 없는데 크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새로 만들어 놓은 건물들이 많이 있다. 농사체험, 박물관 등이 있다. 벽골제 유적지 주변을 함께 관광지화 한 것 같다.
나는 사실 예전에 국사시간에 그냥 외우는 단어, 제천 의림지, 상주 공검지, 밀양의 수산제, 김제 벽골제를 외우면서 왜 제천과 상주는 '지' 이고, 밀양과 김제는 '제'일까 했었다. 지금에야 한자로 '지'는 池 이고, 제는 堤 라고 알지만, 그때는 이해를 못했다. 벽골제는 현재 저수지는 없고, 제방만 일부 남아있는 상태다. 예전에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제 아리랑문학마을과 하얼빈역을 향해 출발한다. 이곳이 거대한 평야이기 때문에 수로도 내가 살고있는 내륙지역의 수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커다란 배수로... 시멘트로 만들어진 수로... 그야말로 정서라고는 한개도 없는 그런 딱딱한 수로변을 걷는다. 별 재미는 없다. 물만 많다면 유럽에서 보던 강 같다. 그렇게 걷다보니 멋대가리 없어 보이는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무슨 여관인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아리랑문학마을 하얼빈 역' 이다. 아마도 김제시에서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건물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는 조형물이 있다. 건물은 황량하지만, 그래도 안의사의 큰 활약을 보니 기분은 그런대로 좋다. 그리고 이웃한 곳에 '아리랑문학마을'이 있다. 이 역시 김제시에서 만들어 놓은 곳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등장인물들이 살았던 초가집이 너무 깨끗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인데. 그때 민초들이 살았던 초가집은 거의 움막 수준 같았을 것이다. 내가 40년도 더 전에 대청댐으로 수몰되기 전 문의면 소재지를 봤을때 그때 거기있던 초가집은 거의 움막처럼 낮으막했다. 그러니 아리랑에 나오는 민초들이 그렇게 높고 번듯한 초가에 살았을리가 없다. 그리고 일제 침탈기관을 만들어 놓았다. 그건 잘한 것 같다. 죽산면사무소는 예전의 우리나라 면사무소 그대로이다. 나도 40년전에 보았던 우리동네 면사무소를 기억한다. 모두 그 형태인데 면사무소와 주재소, 우체국 등이 모두 우리 민족의 수탈을 위한 기관으로 활동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리도 아프고 해서 전시관은 그냥 패쓰.
잠깐 지방도를 이용하다가 다시 농로로 접어들어 논 한가운데를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오늘도 발바닥이 심하게 아픈 것 같아 나가서 신발을 다시 하나 사서 신고 신던 신발은 우체국 택배로 보냈다. 이곳 모텔은 깨끗함에도 45,000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주인이 다른 손님중에 나이 어려보이는 사람이 있다며 신분증을 확인하러 가는 것을 보고 정직하게 운영을 잘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늘 이동한 거리 26.5km, 35,925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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