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5.금)
전날 몸이 않좋은 것 같아서 방을 좀 따뜻하게 해달라고 했는데도 불을 넣었다고만 하더니 밤새 별로다. 온수도 뜨거웠다 차갑다 변덕이다. 피로가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무슨 모텔에 스킨과 로션도 없다. 에이~~
길은 709번 지방도인 오성로를 따라 고개를 내려온다. 좀 내려오니 식당이 하나 있는데 매각한다고 써붙에 놓은걸 보니 이역시 문을 닫았나 보다.
금강철새 조망대는 전에 생극면에 근무할때 들렀기에 패스하고 맞은편 공윈에 들러보니 새는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뭘 만들어 놓기는 잘한다. 인공적으로.
금강하구둑에 위치한 금강휴게소에서 오랜만에 에스프레소를 한잔 사 마셨다. 고맙게도 2천원이다. 맛은 별로지만^^
금강하구둑을 건너는데 자동차 소음이 장난 아니다. 시면트 포장이라 더욱 그렇다. 이것 역시 물을 가두는 것이기에 민물쪽은 별로 깨끗한 것 같지는 않다. 하구둑 근방에는 철새가 오려고 해도 올 수가 없겠다.
강을 건너 서천군에 접어들어 강변을 거슬러 올라간다. 강변에는 자전거도로 또는 보도가 잘되어있어 굳이 포장도로인 장산로를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가다보니 생태원 관광숙박단지 라는게 있다. 강변에 모텔이 네개인가 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손님이 없는 것같다.
관광숙박단지를 좀 지나면 강변에 갈대숲이 온전한 곳이 있다. 이곳에 오니 드디어 철새들이 날아 다닌다. 몇무리는 강에서 날아올라 저쪽 논 쪽으로 날아가고 몇무리는 또 강으로 내려 앉는다.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는 곳은 새들이 기가 막히게 안다. 이녀석들이 갑자기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가니 사진 찍기가 힘들다. 그래도 몇개는 찍었다.
이제 금강을 벗어나 29번국도인 장신로를 걸어야 한다.
동서천IC 진입도로 부근까지는 차량 통행이 꽤많지만 그 이후로는 한산하다.
광암삼거리에서 도로는 충절로 로 바뀌는데 지금부터는 온통 소곡주다. 전에 이곳에 왔을때는 이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모두가 명장이다.
고개를 내려오다가 길 옆에 있는 경복궁이라는 카페겸 식당엘 들러 육개장(12,000원)을 먹었다. 그리고 반주로 30도 정도되는 소곡주를 한잔(3,000원) 마셨다. 맛은 새콤달콤 장수막걸리처럼 산뜻한 맛인데 돗수가 높아 역간 취기가 올라와 많이 마시면 취하겠다. 사장님이 올드팝송을 틀어놓아 분위기를 느끼며 천천히 다 먹었다.
한산모시관에 들러 전시관 구경하고 명장님 시연하는 곳에 가보니 수리중이다. 이 모시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애환과 멍애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모시를 껍질을 까고, 말렸다가 다시 물로 불리고 이빨로 쪼개고 무릎에 비벼 실로 만들고 다시 씨줄과 날줄로 만들어 모시틀에서 천으로 만들고 옷을 만들어 풀을 먹여서 그나마 고급은 양반님네가 입고 자신들은 하품을 입었을 것이다. 비록 모시뿐이 아니고 삼베나 비단도 그러했을 터. 우리네 여인들이 한낮에는 들에 나가 밭을 매고, 밤에는 길쌈을 했으니 그 노고가 이루 말할 수없다. 그외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까지 낳고 키웠으니..... 국토종단을하는 지금도 가끔 논상방뇨(길옆의 논)를 할때마다 나를 남자로 태어나게 해준 우리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한산모시관 조금지나 방문자센터 라고 있는데 그 마당에 영어로 mosi 라고 조형물을 해 놓았는데 우리 전통 모시를 표시하는데도 우리 글이 무시를 당하는 것 같아 씁쓸해 진다.
소곡주 무형문화재 복합전수관을 문이 닫혔다. 주말에만 여는지는 몰라도 안내는 없고 다만 뒷건물로 오면 술은 살 수 있다는 안내문만 있다.
원래 한산면에 있는 귀빈장여관에 묵으려고 했으나 소재지에 있는 귀빈장, 궁상장, 노란달팽이 모두 문이 닫혔다. 길옆에 있는 분께 여관을 물으니 저쪽에 산성파크로 가란다. 이궁~~ 거기를 지나왔는데. 할수 없지. 다시 가는 수 밖에.
일단 숙소에 들러 체크인(35,000원) 하고 쉬었다가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에 갔다. 가는데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 거의 날아갈 뻔 했다. 이상재선생은 호는 월나으로 본명은 계호란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 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1888년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다. 미국에 다녀온뒤로 1898년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고 한다. 1927년 신간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그해 3월29일 78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한다.
생가는 원래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1955년에 훼손되우 유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차례에 걸쳐 복원되었고 1990년에 충청남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오늘 이동한 거리 26.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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