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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조선의 뒷골목 풍경

by 수레의산 2017. 2. 1.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2003

1. 수만 백성을 살린 이름없는 명의들

  ㅇ 의업 정도를 실천한 민중의,  조광일

      교만을 떨고 귀인이나 부잣집만 찾아가는 의원을 미워한다. 40에 수천명을 살렸으니 50에 이르면 1만명을 살릴수 있을 것이다. 이정도면 족하지 아니한가?

    ㅇ 馬醫에서 어의로, 종기 치료의 신기원을 연 백광현

       현감까지 승진하였으나 치료에는 귀천을 가리지 아니함.

    ㅇ 떠돌이 약장수 피재길, 이동 벼락출세 하다.

    ㅇ 시체탕(감꼭지 달인물)으로 임금의 병을 고친 유상

    ㅇ 전염병 전문의 홍익만

    ㅇ 정약용은 서양의학에 심취하여 한의학을 부정하였다.

    ㅇ 민중의 이헌길은 한때 유혹에 빠졌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민중의로 돌아섰다.

    ㅇ 의술을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은 궁궐에 있는 내의원과 전의감이 있었지만 이들은 왕족과 고관대작을 위한 의료기관이었으며, 혜민서와 활인서가 있었지만 서울에만 있었기에 지방에는 공식적인 의료기관이 없었고, 더욱이 민중들은 의료의 밖에 있었다. 이들을 치료하고 고쳐준 사람들은 정통 의원들이 아닌 어깨넘어로 배운 의원들이 대부분 이었다. 지금의 시대에도 민중의가 찾아보면 있겠지만 조선시대의 조광일 같은 의원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돈이 없어 죽거나, 돈이 없어서 삼성에서 일을 하다 암에 걸려 제대로 된 치료도 못받고 삼성으로 부터 제대로 된 사과도 못받는 세상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2.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된다.(군도와 땡추)

    ㅇ 멋있는 도적 일지매는 도둑중에 협객이다. 탐관오리와 부정한 자들의 뇌물을 훔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다고 함. 그리고 도둑의 누명을 다른 사람이 쓸까 두려워 일지매를 그려 놓았다고 한다.

    ㅇ 모이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 - 조선시대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 중세사회 인데, 기근이 들거나 탐관오리의 수탈을 못견디면 땅을 떠나고 그들은 결국 돌아다니다가 죽거나 모여서 도적이 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다시 사회가 안정이 되고 풍년이 들면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백성이 된다.

    ㅇ 홍길동의 후예 - 홍길동은 1500년경에 활동하였다. 그 이후 많은 도둑 무리들은 홍길동의 후예를 자처하고 나섰다.

    ㅇ 산적대의 통신망 땡추 - 조선시대는 승유억불 정책으로 스님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기에 사회에 불만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스님들이 나는곳도 산속이고 도적들이 사는 곳도 산속이니 그들의 일부는 한패였을수도 있다. 땡추(당취, 땡초) 에는 금강산 땡추와 지리산 땡추가 양대산맥을 이루었다고 한다.

    ㅇ 양대도적 목단설과 추설 - 백범 김구선생을 만난 김진사가 전하는 니용으로 강원도에 기반을 둔 도적을 '목단설' 경상.전라.충청을 기반으로 하는 도적을 '추설' 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금강산 기반의 땡추와 지리산 기반의 땡추와 일맥 상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쨋거나 이 도적들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제의 경찰력에 밀려 점점 소멸되었다. 도둑이 영웅이 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이다. 병든 체제에 대한 저항의 이미지가 있다.

    ㅇ 임꺽정 부대가 활동할 당시 사관은 윤원형과 심통원을 두고 "물욕을 한없이 부려 백성의 이익을 빼앗는 데도 못하는 짓이 없는" 대도 라고 했다. 조정에 있는 권세가가 대도라는 것이다. 요즘 신문과 방송에 나날이 소식이 올라오는 박근혜-최순실 일당이야 말로 윤원형과 심통원보다 더한 도둑이 아닐까 생각한다.


3. 투전 노름에 날새는 줄 몰랐다.(도박)

   ㅇ 도박의 전제조건

      - 최소의 자본으로 최대의 이익획득

      - 불확실성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ㅇ 조선시대의 도박은 ?

       바둑, 장기, 윷, 쌍륙, 투전, 골패, 척사 등이 있었는데 초기에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에는 아무래도 경제규모가 작고 후기만큼 사회의 불확실성도 적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둑, 장기, 윷은 쉽게 누구나 하기 어렵거나 도박으로 하기에는 회전이 느리다는 특징이 있어 많이 하지는 않았다고...

       그러다가 투전은 1644년에 역관 장현이 북경에서 들여왔다고 하는데 조선 말기로 접어 들면서 경제규모가 점점 커지고, 사회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일대 유행했다고 한다. 이 투전은 화투가 들어온 후에도 다섯장을 가지고 하는 '짓고 땡'에 그대로 전이 되었다. 예를들어 '땡', 가보, 짓는것 등은 그대로이다. 오죽해 조정에서도 노름의 적패를 많이이야기 하고 금지도 하였지만 양반들 까지 가세하여 유행을 시켰다고 한다. 

     ㅇ 현대의 도박은?

        지금이야 나라에서도 도박을 금지... 아니 장려.... 아니 금지하고 있나? 일단은 개인들끼리의 도박은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경마를 레저라는 미명하에 장려하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카지노, 국가가 직접 나서서 하는 복권사업등을 하고 있다. 저자의 말로는 국가가 도박을 독접하기 위해 자신이 허락한 도박만 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요즘은 화투에 카드에... 뭐 난 도박을 모르니까...


4.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술주정(금주령과 술집)

    조선시대에는 잦은 금주령이 발동되었다고 한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술집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주로 자가 주조하는 경우가 많았고, 술을 판매하는 집도 그저 술을 판매할 뿐 안주와 함께 마실수 있는 집은 없었던 같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상품 경제, 화폐경제가 활발하지 아니하였고, 특히나 곡식으로 만드는 술을 평민들이 그렇게 쉽게 마실 수는 없었을 것이고 양반들이나 마셨을 텐데, 양반들은 하인도 많고 하니 집에서 주조하여 마셨을 것이다.


     특히 왕이 죽거나 가뭄등으로 흉년이 들면 조정에서 그로 인한 양곡의 낭비를 들어 금주령을 발령했지만 양곡절약의 효과는 미비하였다고 한다. 평민들의 집은 나졸들이 아무때나 들이닥쳐 주조 여부를 조사할 수 있었겠지만 양반님네 집이야 어디 감히 들어가서 조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 양반님네들은 마음놓고 술을 빚어서 자기들끼리 마셔댔을 테니 양곡 절약의 효과가 있었을 턱이 없다.


     조선의 중기 이후에는 그나마 술을 판매하는 집이 생겨났고, 병술을 판매하는 집도 있었다고 하나, 조선 영조는 금주령을 가혹하게 실천했다고 한다. 영조는 53년간을 재직했으니 아마도 조선의 술집은 종적을 감췄으리라 생각된다. 영조 초기에는 술을 마셨다 하여 사형까지 집행했고, 그 사형이 심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파직을 정도로 강경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 사형까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금주령을 강력히 시행하였다고 한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금주령은 해제되었으며 그 이후 술을 판매하는 집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물론 정조때에도 일부 신하들이 금주령을 발포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왕은 거부하였다고 한다. 정조가 생각할 때에는 별로 실효성도 없고 애꿎은 평민들만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조선의 왕 중에 괜찮은 왕이 세종대왕, 정조대왕, 광해군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하여간 조선은 툭하면 금주령을 내렸기 때문에 술집문화가 제대로 될 수 없었고, 못마시게 하니 기회만 되면 술을 마시는게 아니고 들이 부었던것 같다. 그래서 박지원은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술주정"이라고 했던것 같다. 이와는 반대로 청나라에는 술집이 호화롭고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마시면서 정치도 논하고, 시도 짓고 그리된 것 같다고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말했다. 지금의 한국사람들 술 마시는 것도 조선왕조 500년의 유전자와 일제 강점기의 급한 성격등 비정상적인 문화의 유전자가 있어 술을 많이 마시고, 많이 마시는게 자랑거리 처럼 되고 그런게 아닌가 생각된다.


5. 타락과 부정으로 얼룩진 양반들의 잔치(과거)

   요즘은 발전성 보다는 직업의 안정성이 우선시 된다. 특히나 97년 IMF 이후에 잘못된 경제정책, 노동정책이 유입되어 사기업의 일자리가 보수는 물론 정년의 보장도 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시험에 매진하고 있다. 작가의 책에는 사법고시, 행정고시를 말하고 있지만 요즘은 그것도 없어지고 로스쿨로 부와 권력의 대물림이 더 한층 심해지고 있다. 시험 한번으로 신분의 수직상승이 이루어 지는 그런사회가 올바른 사회일 수는 없다. 그리고 신분의 수직 상승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내 달리는 기상으로 도전해야 하는 시대에 그저 안정적인 공무원사회로 인재들이 모이는 사회 역시 올바른 사회일 수는 없다.  현재 공무원에 대한 대우가 특히 좋아진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사기업의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악화되었다. 내가 공무원을 시작한 1979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9급 공무원은 상대적으로 좀 쳐지는 직업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를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직장 일반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대학교를 나와도 사회에 나가서 직장을 잡기도 힘들지만 그나마도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당장 내 자식도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아직도 비정규직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가 돈이 많은 부자이거나, 고위관료, 판.검사 등이면 그 자식들에게 고액 과외등을 시키고 충분히 지원을 해주어(몇년이고 재수도 시킬 수 있다) 그들이 소위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등을 보거나 로스쿨에 들어가 그들도 고위 공무원, 판검사를 하거나 그 아버지의 회사에 처음부터 무슨무슨 본부장, 실장, 부사장의 직책을 맡는다. 그러니 아무리 자기의 능력이 뛰어나도 명문대학교를 들어가지 못하거나, 로스쿨에 들어가지 못하면 별볼일 없게 된다. 그러니 그런 사회가 올바른 사회일까?


    책속의 조선시대 과거는 우리가 자칫 가장 공정한 제도였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을 알면 기가 찰 노릇이다. 조선시대 관료의 자리는 500개 정도라는데 해마다 과거시험 합격자는 수백명씩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과거시험장은 그야말로 난장판 이었다고 한다. 응시자만 들어가는게 아니고 대신 말로 읊어주는 사람, 대신 글을 써주는 사람, 자리를 차지해 주는 사람, 답안지를 빨리 내주는 사람등 여러사람이 들어갔다고 하니 돈없는 시골사람은 멀리 뒷자리에 앉아서 과거 제목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고 답안지 자체가 한꺼번에 3만장씩 되었다니 채점자가 뒤쪽까지 보지도 않고 합격자를 발표했다고 한다. 그나마도 자리는 한정 되었기에 몇몇 양반가에서 독차지 했다고 한다. 그러니 붕당이 생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평민, 중인, 서얼은 아무리 똑똑해도 국가 정책을 구현하는 핵심적인 자리에 갈 수도 없었을 것이고, 반대로 문벌은 공부를 안해도 요직에 들어갔을 것이니 이런 개판인 나라가 또 있을까? 최순실이나 박근혜, 그리고 새누리 같은 인간들이 판치는 지금이나 별반 다를것이 없겠다.


6. 누가 이 여인들에게 돌을 던지는가? (감동과 어우동)

    조선시대는 양반, 유교, 도덕적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쓰고 있다. 그래서 금욕을 강조하고, 특히 여성의 사회활동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여성은 남성앞에 마음대로 나서지도 못하게 하였지만, 양반님네들의 음탕한 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겉으로는 점잖은척 하지만 뒤로는 음흉한 양반놈들, 조선시대 남녀의 불평등, 남성들의 성적 욕망의 해결을 위한 제도라고 볼수 있다. 이는 '찬한한 천개의 태양'에서 보듯이 탈레반 집권시기의 아프가니스탄과 비슷하다. 그놈들도 여성에게 부르카라는 얼굴을 모두 가리고 눈만 내 놓고 다니는 옷을 강요하였다. 남자 놈들은 마음대로 자기들의 성욕을 여자에게 배설하면서 모든 죄는 여성에게 덮어 씌우는 부도독한 짓을 자행하였다. 그놈들이나 조선의 양반놈들이나 똑같지 않은가?


    책에서는 유감동과 어우동의 간통행위를 논하고 있다. 그녀들과 간통한 대상은 거의 모두가 사대부이고 벼슬이 꽤나 높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남자들은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곧 다시 복지하였다. 그에 반해서 유감동과 어우동은 모두 교살을 당했다. 거의 모든 죄악을 여성들의 음탕함 때문으로 덮어 씌워 버린것이다. 성욕을 법적으로 막는다고 그게 막힐까? 겉으로 막아 놓으면 다른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요즘도 대책없이 그냥 막아 놓으니 그 물이 옆으로 새고, 밑으로 새는것 아닐까? 인간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거기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어디서 들으니 일본은 섹스비디오 등이 활성화 되어 있어 엄청나게 문란하고 밝힐것 같지만 오히려 그들은 섹스에 무덤덤 하기까지 하다고 한다. 그들은 성욕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거나 억압을 받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가능하기에 오히려 그렇게 무덤덤 하게 되는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억압하니까 틈만 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것 아닐까? 그래서 밤문화, 무슨무슨 방, 노래방에서, 룸싸롱에서, 안마에서 그렇게 된것 아닐까 생각한다. 현대에도 여전히 조선시대 양반처럼 앞에서는 근엄한척, 뒤에서는 음탕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7. 서울의 게토, 도살면허 독점한 치외법권 지대(반촌)

    조선시대에는 소가 농업의 기반이기에 소를 잡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소를 많이 잡아서 흉년이 든다고도 했다고 한다. 특히나 흉년이 들면 소를 잡는것을 법으로 금했다고 한다. 이 도살 금지법은 강력하게 시행되었지만 매번 실효는 없었다고 한다. 당연하겠지. 조선시대에 어느 평민이 비싼 쇠고기를 먹을 수 있었을까? 농민들 역시 자기의 농사를 짓는 가장 큰 자산이었고, 그나마도 대농이나 되어야 소를 키울수 있었으니 쇠고기는 아마 냄새도 맡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렸을 때 쇠고기는 명절때 탕국에 들어있는 질기디 질긴 쇠고기 국물밖에 몰랐으니까.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쇠고기를 먹을 수 있던 사람들은 양반들 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될 일이 있나?  제놈들이 쇠고기를 먹으면서 소를 잡지 말라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이야?


   그건 그렇고 옛서울 성균관 주변에 반촌이라고 있었다. 반촌의 유래는 고려때 유신 안향이 자신의 가노 100명을 성균관에 희사하여 일을 하게 했었으며, 조선이 개국하면서 한양으로 성균관이 이전함에 따라 함께 따라온 개성사람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곳과 교의가 없었으며 반촌에서 태어난 남자는 직동이 되었다가 숙부가 되거나 여자는 성균관의 음식 등을 담당하는 여종이 되었다고 한다. 성균관은 국학이므로 국가에서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쇠고기를 먹였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반촌에서는 소를 잡고 판매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하며, 치외법권 지대였다고 한다. 한번은 반촌에 금란이 통하지 않아 포교가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자 영조가 반촌에 들어가라고 명을 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스트라이크를 벌여 결국에는 영조가 그 명을 철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차별적인 대우를 받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균관의 위세에 의해 약간의 보호도 받았다고 한다. 20세기 들어오면서 근대적 교육제도에 따라 성균관의 위세가 무너지고 따라서 반촌도 해체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조선은 신분제도에 따라 한양에서도 사는곳이 정해졌다고 하는데, 이게 조선시대에만 있는것은 아닌것 같다. 저자도 말하였지만 지금도 강남지역과 강북지역, 또 노원, 미아리지역 등이 사는 부류가 좀 다른것 같다. 그리고 돈에 따라서 신분이 달라지고 있지 않은가? 또한 사람이 먹는 것이 중요한데 농민들의 처지는 또 어떤가?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반면에 손에 물한번 뭍히지 않고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불과 5~6세에 재산이 몇십억씩 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이 일을 하는지? 일하지 않아도 큰소리 치는 사회..... 씁쓸하다.


8.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뒤흔든 무뢰배들(검계와 왈자)

   절대 조용하지 않은 아침의 나라 조선. 조선에도 왈패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아마도 건달쯤 될것 같다. 이들중에 좀더 폭력적인 깡패를 말하는 것이 검계쯤 될것이다. 조선의 왈패에는 일부 양반중 하급무반, 그리고 대부분 중인계급 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상승은 할 수 없기에 주로 도박, 음주, 기생, 연예에 심취했다고 한다. 유명한 왈패는 힘도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왈패들이 기생의 기둥서방을 하였는데, 기생들의 뒤를 봐 주고 그 수입의 일부를 챙겼다고 하는데 아마도 지금의 기둥서방 보다는 나은것 같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오로지 권력을 다투고 있는데 비해 이들 왈자는 그저 한 팽생을 주색잡기에 쏟은것 같다.


9. 조선 후기 유행 주도한 오렌지족 (별감)

    조선 후기에 별감들이 멋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별감에는 대전별감, 46명, 왕비전 별감 16명, 세자궁 별감 18명등 80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대진별감중 가장 높은 사알,사약은 정6품, 부사약은 종1품이고, 정7품 사안은 왕비전과 세자궁 별감이었다고... 그리고 종7품부터 종9품까지 있었는데 그들은 돌아가면서 보직을 받았다나? 가끔 사극에 등장하는 붉은색 옷을 입고 초립에 깃털을 꼽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인데, 이들이 시대의 유행과 가무를 이끌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기생들이나 민간 풍류악의 최고 고객이 별감들 이었고, 그래서 별감들의 잔치는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고 한다. 하도 등장하는 용어가 많아서 제대로 옮기지를 못하겠다.


    이만하면 별감들의 생리가 상상이 되는가? 별감은 복색의 사치와 유행을 주도하고, 시정의 유흥공간을 장악한 그런 부류였다. 이들이 역사 발전에 긍정적 기능을 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존재가 있기에 조선 후기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인간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와 경제가 소외시킨 인간의 구체적 삶의 모습 말이다. - 책의 본문에서 -


10. 은요강에 소변 보고 최음제 춘화 가득하니(탕자)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탕자의 최후는 모두 같다. 여자와 도박과 술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끝내는 자기 자신마저 망쳐 버리는 일인데, 모두가 알면서도 일단 빠지면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조선시대 후기의 탕자는 거의 별감 직책을 갖고 있었던것 같다. 세도 양반님네야 벼슬이 있으니까 국고에서 빼 쳐먹었을 테고... 실제 인물로 이원영 이라는 사람을 들고 있다. 이 사람은 원래 대대로 거문고를 잘 켜는 집안이라고 했다. 직책이 없는 벼슬로 정2품까지 갔다고 하니 잘 나갈때에는 그 유명세가 대단했을 것이다. 젊었을 때에는 매양 기생집에 빠져서 모든 것을 가져다 주고, 나이 먹어서 눈이 멀고 가산을 탕진하여 결국 조강지처 곁으로 갔다고 한다. 그래도 조강지처가 그를 쳐 내지 않고 받아 들여서, 그래도 늙어서 라도 함께 사니 좋다고 했다니, 참 우리나라 선조 여성분들의 희생과 아픔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밥맛없고 아무리 싸가지 없고, 아무리 가산을 탕진해도 여자로서 나설 수 없었던 사회 구성이 문제였으리라. 그 외 소설속의 두 탕자를 이야기 한다. 하나는 이춘풍전의 이춘풍과 게우사의 무숙이다. 그들은 소설이니까 그 부인네들이 남편을 가르치고, 골탕을 먹여서 결국 탕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고, 그나마 가산을 지켜내었다는 이야기 이다. 그 탕자의 행동은 이원영이나 이춘풍이나 이무숙이나 다를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소설속의 탕자들이 더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