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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덕혜옹주

by 수레의산 2017. 1. 25.

덕혜옹주, 권미영, 다산책방

아래는 다음백과에 이상각(작가, 시인)님이 올려 놓은 글이다. 소설은 아래와 같은 덕혜옹주의 사실에 기반하고 약간의 소설적인 사항을 가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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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 왕실에는 후궁 소생의 수많은 옹주들이 있었지만 정비 소생의 공주보다 서열이 낮은 신분의 한계 때문에 역사적으로 조명 받지 못했다.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인물로는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사도세자의 동생 화완옹주와 망국의 황제 고종의 말년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덕혜옹주를 들 수 있다. 고종에게는 일찍이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고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명성황후 민씨 소생의 순종 이척, 귀인 장씨 소생의 의친왕 이강, 황귀비 엄씨 소생의 영친왕 이은, 복녕당 양씨 소생의 덕혜옹주까지 3남 1녀뿐이었다. 그 때문에 덕혜옹주는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애지중지 키워졌다.  덕혜옹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한국인들에게 조선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발랄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으며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에 걸렸다.

    몇 년 뒤 어머니 귀인 양씨의 죽음으로 덕혜옹주의 심리 상태는 벼랑 끝까지 몰려 정신분열증으로 비화되었지만 냉혹한 일제는 정략결혼을 통해 그녀를 더욱 비좁은 새장 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 때문에 병세가 심화된 그녀는 딸과 생이별하고 사방이 가로막힌 정신병원에서 청춘을 흘려보내다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안주했지만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그녀의 육신은 아득한 유년의 기억만을 남긴 채 파랑새처럼 저 세상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

    1907년 고종은 일본에 의해 순종에게 강제 양위되고 그 대신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1910년 강제병탄으로 영친왕은 다시 왕세자로 강등되고,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영친왕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1911년에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잃고 나서 마음을 기대고 있던 영친왕의 생모 황귀비 엄씨마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상실감과 배신감에 휩싸인 고종은 홀로 덕수궁을 배회하며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땅거미가 지면 엄씨의 위패를 모신 영복당에 찾아가곤 했다. 당시 영복당 뒤편에는 궁녀들의 거처가 있었다. 고종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복녕당 양씨, 광화당 이씨, 보현당 정씨, 삼축당 김씨 등 여러 궁녀들과 관계했다. 복녕당 양씨는 덕수궁의 소주방 나인이었는데 1882년 생으로 성은 양(梁) 씨였고 이름은 춘기(春基)였다. 1912년 5월, 서른이 넘은 그녀가 덕수궁 명선당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딸을 순산했다. 고종은 몹시 기뻐하면서 양씨를 귀인(貴人)에 봉하고 ‘복녕(福寧)’이라는 당호를 하사했다. 고종의 말년은 덕혜옹주 탄생 이전과 이후로 크게 대비된다. 옹주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들고 오전 10시 전후에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입은 뒤 식사를 했다. 오후가 되면 선원전에 들어가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며 시간을 보냈고, 밤이 되면 산책을 하거나 궁녀들과 어울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단조로운 생활 패턴이 덕혜옹주가 태어나면서 완전히 뒤바뀌었다. 고종은 이른 아침부터 옹주의 탄생을 축하하러 오는 이왕직과 친인척들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곤 하루에 두세 차례 복녕당에 들러 산모와 아기를 살폈다. 그것도 부족해서 7월 13일에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아기를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 동온돌에 데려다 키웠다. 고종에게 덕혜옹주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고명딸이었다.


    함녕전에서 덕혜옹주를 보살핀 사람은 유모 변복동이었다. 그녀는 결혼하여 남편까지 있었지만 옹주의 유모로 발탁되자 남편에게 다른 여인을 얻어주고 궁에 들어왔다. 고종은 틈만 함녕전으로 들어와 아기를 보았다. 한번은 유모가 아기에게 젖을 먹여 재우려 하는데 갑자기 고종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기겁을 하고 일어나려 하자 고종은 손을 저어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다. 아기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고종은 아기를 한번 안으면 오랫동안 내려놓지 않았고 곁에 있는 궁녀들에게 앙증맞은 손가락을 만져보라고 권하며 즐거워했다. 그처럼 덕혜옹주는 고종에게 금지옥엽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한일합병 이후 이왕가를 관장하고 있던 일본 궁내성은 그녀를 고종의 정식 딸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생모 양씨가 공식적으로 봉작된 후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 격하된 고종의 가족들은 《이태왕가첩적》이라는 족보에 기재되어야만 부인과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왕직에서 고종 일가의 혼인, 자녀의 출생, 명명, 사망 등 중요한 사항이 발생하면 궁내성에 보고하여 추인 받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왕가의 자손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던 궁내성에서 덕혜옹주를 사생아로 취급하면서 족보에 올려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덕혜옹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내내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 이런 상황은 덕혜옹주 다음에 태어난 광화당 이씨 소생의 왕자 이육이나 보현당 정씨 소생의 왕자 이우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들 역시 공식적으로 입적되지 않아 광화당 아기씨, 보현당 아기씨로 불렸다. 이 두 명의 이복동생은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요절했다.  1916년 4월, 고종은 다섯 살이 된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세우고 쿄구치 사다코와 장옥식을 보모로 삼은 다음 귀족들의 딸 7,8명과 함께 공부하게 했다. 함녕전과 준명당은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녀는 매일 아침 사인교를 타고 유모 변복동과 함께 길을 나섰다. 유치원에서는 풍금으로 한일 양국의 동요와 무용을 배웠고 뒷동산에 올라가 나물을 캐며 놀았다. 그녀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고종의 죽음, 불행의 시작           

    그 무렵 고종은 덕혜옹주의 입적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회심의 계획을 세웠다. 일제의 조선정책을 총괄하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옹주를 보여주고 자신의 딸이라는 점을 확인시킨다면 어쩔 수 없이 입적에 동의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인사차 덕수궁을 찾아온 데라우치를 구슬러 유치원에 데려갔다. 그는 옹기종기 둘러앉은 아이들 틈에서 귀엽지만 의젓해 보이는 아이 하나를 불러내 데라우치 앞에 세웠다.

“이 아이가 바로 내 딸이오. 요즘 이 늙은이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건 이 녀석뿐이라오. 얘야, 어서 각하께 인사 올리거라.”

부왕의 명에 따라 덕혜옹주가 얌전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자 데라우치는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엉겁결에 답례를 하고 덕수궁을 빠져나온 그는 총독부에 도착하자 부하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옹주의 인사까지 받았으니 더 이상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군. 오늘은 전하에게 멋지게 한 방 먹었다.”

그렇게 해서 1917년 6월 덕혜옹주는 고종의 셋째 딸로 공인되었고 신분도 왕족이 되었다. 한데 영친왕에 이어 그녀까지 일본에 빼앗길까 두려웠던 고종은 은밀히 그녀의 약혼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을 부마로 내정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이 김황진을 궁궐에서 내쫓는 바람에 덕혜옹주의 약혼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68세의 나이로 의문에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덕혜옹주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더불어 자신도 언젠가 아버지처럼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  그해 고종의 인산일인 3월 1일을 기하여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진 만세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남겼지만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린 쾌거였다. 깜짝 놀란 일제는 그때까지의 강압적인 조선정책을 문화정책이라는 기만적인 방법으로 바꾸었다. 한편 3.1운동으로 고종 황제의 영향력을 절감한 일제는 그의 혼전을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버렸다. 이듬해 3월 덕혜옹주는 어머니 양귀인과 함께 창덕궁의 관물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역시 일제의 고종 지우기에 일환이었다. 그녀의 나이 여덟 살 때의 일이다.

1921년 3월 31일, 창덕궁 효덕전에 있던 고종의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3년상이 끝났다. 그때부터 덕혜옹주의 삶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해 4월부터 덕혜옹주는 일본 거류민들이 세운 일출소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일본 아이들처럼 게다와 하오리 차림으로 마차를 타고 등교했다. 수업을 마치고 창덕궁에 돌아와서는 순정효황후 윤씨에게 ‘호타루(螢) 찬가’ 등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해 5월 4일 정식으로 ‘덕혜(德惠)’라는 호를 받았고, 옹주라는 존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옹주는 얼굴이 희고 키가 컸는데 습자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의 죽음으로 보호막이 사라진 그녀의 운명은 자신도 모르게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 유학, 공포와 고독의 끝자리에서   

    1925년 정월 이왕직 차관 고쿠분 쇼타로는 순종에게 누이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을 통보했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늘 고종황제를 상기시켜주는 문제의 왕녀를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던 것이다. 곤도 시로스케의 《이왕가비사》에 의하면 덕혜옹주의 유학은 왕후의 특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왕가의 여성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왕후가 도쿄에 체류하고 있던 사이토 총독을 어전에 불러 특별히 지시했다는 것이다. 영친왕을 인질로 데려갈 때의 명분이 ‘황태자에 대한 최상 교육’이었다면 덕혜옹주의 경우는 소위 ‘문명한 여성 교육’이었다. 1925년 3월 24일, 순종은 덕혜옹주에게 도쿄 유학을 명령했다. 그것은 일본의 뜻이자 조선을 관장하고 있던 사이토 총독의 뜻이었다. 갑작스럽게 일본행을 통보받은 덕혜옹주는 앞길이 막막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젠 어머니와 생이별하게 되었으니 그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떠밀리듯 경성을 떠난 그녀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이방자 여사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지만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14세의 소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다. 영친왕은 어린 나이에 동병상련의 신세가 된 막내동생 덕혜옹주를 성심껏 돌봐주었다. 그해 4월부터 옹주는 일왕가와 화족 집안의 자식들이 다니는 여자학습원 중등과 2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에 등교하고 오후 2시에 하교한 뒤에는 학습원 교수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고 틈틈이 동요도 지었다.  덕혜옹주는 자신이 대한제국의 황녀로서 일제의 눈엣가시라는 점을 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 고종의 사망 원인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학교에서도 수돗물을 마시지 않고 늘 끓인 물을 담은 보온병을 들고 다녔다. 동창생 소마 유키카가 까닭을 묻자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왜 여기에 있나요?”라는 소마의 철없는 질문에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만리타국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 살고 있던 그녀에게 그것은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1926년 3월, 덕혜옹주는 영친왕과 함께 귀국하여 와병 중이던 순종을 알현하고 도쿄로 돌아갔다가, 순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4월에 다시 귀국했다. 그달 25일 순종이 승하했지만 그녀는 일제의 닦달 때문에 인산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도쿄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로 인해 촉발될지도 모를 한국인들의 동요를 의식한 조치였다. 일본 생활 5년째인 1929년 5월 29일 어머니 귀인 양씨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한 덕혜옹주는 검은 상복 차림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일제는 귀인 양씨가 《왕공가궤범》에 따르면 귀족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복상을 할 수 없다면서 그녀를 장례 이틀 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그 일로 옹주는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허탈한 심정으로 일본에 돌아온 덕혜옹주는 영친왕의 저택에 머물며 침중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녀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었는데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면서 하루 종일 방에 누워 있고, 식사를 자주 걸렀다.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갑자기 뛰쳐나가 아카사카 쪽으로 무작정 걸어가기도 했다. 영친왕 부부가 이상하게 여기고 병원에 데려가 진찰해 보니 정신분열증이었다.

정략결혼, 스스로 어둠 속에 갇히다                

    그 무렵 일본은 덕혜옹주를 일본 왕족과 결혼시킴으로써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그녀의 존재를 지워버리고자 했다. 그렇듯 막후에서 자신의 혼사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지만 당사자인 덕혜옹주에게는 어떤 선택권이나 결정권이 없었다. 당시 그녀는 정신분열증이 악화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손님이 찾아 왔는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크게 웃어젖히는 바람에 상대를 놀라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본 왕실에서는 덕혜옹주의 남편으로 쓰시마의 36대 도주 24세의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를 내정했다.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 이었던 그는 다재다능한 청년으로 대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하고 대마도지에 시를 기고 했으며 유화를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가 폐번치현(廢藩置縣. 번을 새로운 중앙집권적 행정구역인 현으로 바꿈)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자 후원자였던 사다코 왕후가 의도적으로 덕혜옹주와 맺어주었다. 소 다케유키도 정략결혼의 희생자였다. 덕혜옹주가 아무리 고귀한 신분에 지참금도 많다지만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그 역시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그렇지만 왕실의 일원으로서 명령이 떨어진 이상 순종하는 것이 그들의 생존방식이었다. 1931년 5월 8일 덕혜옹주가 결혼식을 치르자 조선 백성들은 비탄에 빠졌다. 조선일보는 그녀의 결혼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의도적으로 남편 소 다케유키의 얼굴을 지워버리기까지 했다.  소 다케유키는 신혼 초기 각종 행사에 덕혜옹주와 부부동반으로 나타났는데 표정이 밝았다고 한다. 그러나 덕혜옹주의 증세가 심해지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그 무렵 일본 사회에서 정신병은 부끄러운 일로 취급받았으므로 소 다케유키는 두문불출 하며 아내를 간병 했고, 그녀가 자꾸 밖으로 뛰쳐나가려 해서 발목에 족쇄를 채워놓기도 했다. 일본의 의도대로 그때부터 덕혜옹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사라졌다. 남편 소 다케유키도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외부와의 교류를 끊어 버렸다. 침묵의 나날 속에서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귀족들의 근황을 담은 《황실황족성감》에 덕혜옹주가 1932년 8월 14일에 딸 소 마사에(宗正惠)를 낳았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그 후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일본에 미군정이 들어섰다. 1947년 10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신적강하(臣籍降下), 즉 '왕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평민이 된다는 결정’에 따라 일본의 왕족들은 연금을 비롯한 각종 면세 특권을 박탈 당했다. 이때 소 다케유키도 백작이라는 작위와 재산상의 특권을 잃었다. 이왕가 역시 왕족으로 간주 되었으므로 덕혜옹주에 대한 지원도 끊어졌다. 궁지에 몰린 소 다케유키는 간병에 지쳐버렸는지 1946년 그녀를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10년 뒤인 1955년에는 영친왕 부부와 협의한 끝에 이혼했다. 그리하여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성씨인 양(梁)과 봉호인 덕혜를 조합한 ‘양덕혜’(梁德惠)라는 이름으로 따로 호적에 등재되었다. 이혼과 함께 소 다케유키가 혼례물품과 딸 마사에의 한복, 생활용품 등을 돌려보내자 영친왕 부부는 화가 치밀었던지 그것들을 모두 문화여자단기대학 학장 도쿠가와 요시치카에게 기증해 버렸다.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한 그 해에 가츠무라 요시에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여 2남 1녀를 얻었다. 현재 쓰시마 이즈하라 항구의 시미즈 공원에는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결혼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31년 10월 덕혜옹주 부부가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쓰시마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팔번궁신사 경내에 ‘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 宗伯爵家御結婚奉祝記念碑)를 건립했다. 그런데 1955년 두 사람이 이혼하자 주민들이 쓰러뜨린 후 방치하다가, 2001년 부산-쓰시마 직항선박인 씨플라워호 취항으로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자 전시용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파랑새처럼 날아가다

    조국에서 잊히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덕혜옹주는 자신만의 세계에 웅크린 채 꿈꾸듯 살아갔다. 이런 그녀의 존재가 어린 시절 약혼할 뻔했던 김장한의 친형 김을한 기자에 의해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1950년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김을한 기자는 소 다케유키에게 전화를 걸어 덕혜옹주의 근황을 물었지만 입원중이라는 냉담한 답변을 받았다. 그는 영친왕을 만나고 나서야 그녀가 매월 1만원에 달하는 비싼 입원비를 내고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병원을 찾아가 보니 옹주는 멍한 눈빛으로 독방에 홀로 앉아있었다. ‘한때 고귀했던 왕녀가 저토록 초라한 몰골로 변하다니…….’ 비감에 젖은 김을한 기자는 그 때부터 정부 요인들을 찾아가 덕혜옹주를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영친왕의 귀국조차 용인하지 않던 속 좁은 이승만 정부가 덕혜옹주의 신변에 신경 쓸 리 만무했다. 1956년 8월 29일자 일본 마이니치신문에 덕혜옹주와 관련된 또 하나의 비보가 게재되었다. 당시 24세였던 그녀의 딸 마사에가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가출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수색작업에 나섰지만 그녀는 영영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덧없는 세월이 흘러갔다. 한국에서는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종말을 고했고, 1961년에는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았다. 그해 11월 12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도쿄에 들렀다. 그때 김을한 기자는 박정희를 찾아가 덕혜옹주의 귀국을 간청했다. 그러자 망국의 왕족을 돕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익하다고 여긴 박정희는 전폭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1962년 정초에 고종황제의 손자 이우공의 부인 박찬주 여사가 둘째아들 이종과 함께 CAT 편으로 그녀를 데리러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리하여 1월 26일, 51세의 덕혜옹주는 38년 동안의 원치 않던 일본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실은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소학교 동창 민용아와 당시 72세였던 유모 변복동이 눈물을 흘리며 맞이했다. 변씨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이후 1972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을 다하여 옹주를 돌봐주었다. 덕혜옹주는 곧바로 창덕궁 낙선재로 가서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다음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 그해 해 2월 8일 그녀는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고 ‘이덕혜’란 이름을 되찾았다. 그해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고 왕족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했다. 그 혜택을 받은 덕혜옹주는 7년 동안 병원에 머물다. 1967년 5월, 퇴원하여 낙선재에 들어갔다.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안에 있는 수강재로 거처를 옮겼다. 그 무렵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그를 미워하던 종실 관계자들이 매몰차게 쫓아냈다. 어렵사리 옛 아내를 만나러 왔던 소 다케유키는 허탈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1985년 77세의 나이에 쓰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소 다케유키는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서 일왕의 명령에 따라 결혼했지만, 아내의 심화된 정신병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쓴 시에는 덕혜옹주를 ‘사랑하는 아내’로 묘사하고 있다. 덕혜옹주도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수강재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곳에는 옹주가 맑은 정신일 때 썼다는 한 장의 낙서가 남아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소설은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소설적인 내용으로는 덕혜옹주의 탈출을 위하여 고종이 옹주와 약혼을 시키려 했던 김장한을 출연시켰다. 그외 일본인 끄나풀인 갑수와 그의 동생 기수 역시 소설속 허구이다. 소설속에서는 옹주의 결혼식때 1차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였고 나중에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던 옹주를 김장한등이 탈출 시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덕혜옹주의 환국은 그당시 신문기자였던 김을한의 노력으로 박정희때 이루어 졌다. 나는 이런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나라를 빼앗긴 것은 조선왕가 아닌가? 그리고 그들에게 부역하고 빌붙어 먹던 양반들 아닌가? 대한제국이 망하고 나서도 마마를 찾고 황제를 찾고 했던 양반들이 싫다. 고종과 순종은 아무리 일본놈들이 어떻게 했어도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거부했어야 했다. 신하들이 말을 안들으면 내쳤어야 했다. 자기들의 목숨이 두려워 결국 굴복한 것 아닌가? 일본의 세력에 겁을 먹고 "의병들은 모두 복귀하라" 라는 칙령을 발표한 것도 그렇고, 또 그말을 듣고 의병 지휘관을 자처했던 양반나부랭이 들이 하루아침에 의병대를 해체하고 복귀한 것 들도 맘에 안든다. 읽기를 주저 했지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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