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을 다녀오다.
2007년 2월 22일 대학입학을 앞둔 딸래미가 창덕궁의 부용지를 꼭 봐야 한다며 함께 가자고 졸라대서 하루 휴가를 얻어 서울로 향했다. 창덕궁은 매주 목요일만 선착순 1천명에 한해서 자유관람이 되고 그 외에는 일반관람밖에 되지 않는다. 자유관람은 말 그대로 마음대로 궁궐을 다니며 관람을 할 수 있는것이고, 일반관람은 문화재를 설명하는 안내인의 안내를 따라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는 코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아무래도 일반관람은 안내인을 따라 다녀야 하므로 자세하고 천천히 관람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 설명을 들을수 있다는 장점과 입장료가 자유관람은 15,000원임에 반해 일반관람은 3,000원으로 저렴하다. 일반관람은 정해진 시간이 될 때까지 돈화문에서 대기하게 된다.
창덕궁은 태종5년(1405)정궁인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조선의 궁궐이다. 임진왜란(1592-1598)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후, 경복궁은 불길하다는 이유로 고종2년(1865)까지 폐허로 방치되었으나, 창덕궁은 광해군(1608-1623)때 곧바로 재건되어 가장 오랫동안 실질적인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평지에 지어진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남북을 축으로 하는 일직선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된 데 비해,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의 건물들과 정자들은 산의 지형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창덕궁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점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뛰어난 점이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ㅇ 돈화문 (보물)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12년(1412)처음 지어 졌고 광해군 원년(1609)에 중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정문 중 가장 오래되었다. ‘돈화’는 백성을 가르치어 감화시킨다는 뜻이다. 돈화문은 단청이 매우 아름다운데 안내인의 말에 따르면 단청은 궁궐, 절,향교 등 외에는 할수 없다고 한다. 돈화문을 들어가면 바로 300~400년 된 회화나무 여덟그루가 있다.
ㅇ 인정전(국보) 창덕궁의 으뜸되는 건물이다. 신하들의 하례,외국 사신의 접견 등 왕의 공식적인 행사를 거행하던 의식의 공간이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창덕궁을 조성할 때 세워진 후, 임진왜란으로 불타 광해군 1년(1609)에 복원되었다. 현재의 인정전은 순조3년(1803)의 화재로 그 이듬해에 재건된 것이다. 또한, 순종1년(1908)내부의 일부가 서양식으로 고쳐졌다.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은 인정전과 함께 세워졌으며 현재의 것은 화재로 불턴 것을 순조3년(1803)에 재건된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전 내부에는 전기등이 많이 달려 있고 용상 뒤쪽에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다.
ㅇ 선정전(보물) 선정전은 임금의 집무실이다. '선정' 이란 정치를 베푼다는 뜻이다. 선정전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세조7년(1461)이다. 임진왜란을 포함한 여러 차례의 화재로 불타 인조 25년(1647)에 재건되었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선정전 앞마당에는 임금님의 자동차 보관소가 있다.
ㅇ 희정당 처음에는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임금의 집무고안으로도 사용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지어졌다. 이때 내부의 일부는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ㅇ 대조전(보물) 왕비의 침전이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왕비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은 것으로 내부는 일부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사실 보이는 곳은 마루로 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안쪽에 온돌방이 있다고 한다. 대조전은 흔히 보이는 용마루가 없다. 이유는 임금이 용으로 비유되므로 임금이 자는곳에 또 용마루를 얹는것이 불합리 하다고 해서 용마루가 없다고 한다. 이는 경복궁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위는 '드무' 라고 하며 물을 담아 놓으면 화마(火魔)가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ㅇ 흥복헌 대조전 옆에 붙어 있는데 말기에 순종이 기거를 했다고 하며 이곳에서 경술국치일에 국새를 내어 주었다고 하는데 일부에서 국새를 내주지 않았다고 하는 이론도 있다. 어쨋거나 큰 건물에서 밀려나 초라하게 있었다니 나라가 힘을 잃어서는 아니되겠다.
ㅇ 수라간 조선시대의 수랏간을 본다고 하여 내심 기대했는데 이건 아니였다. 조선 말기에 수랏간이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ㅇ 궁궐 아궁이 이곳이 뒷쪽에 있는 아궁이다. 이 아궁이의 연기는 멀리 떨어져 있는 굴뚝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ㅇ 후원 태종의 창덕궁 창건 당시에 조성되어 창덕궁과 창경궁의 공동 후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불타 버리고, 1623년 인조 때부터 역대 왕들에 의하여 개수.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인공적인 정원을 삽입시켜, 최소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서 자연을 더 크게 완성시킨 절묘한 솜시를 자랑한다. 4개의 골짜기에 각각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 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결국은 큰 자연인 뒷산 매봉으로 연결된다. 세계 대부분의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인데 비해, 창덕궁 후원은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뭄으로 느끼는 체험 정원이었다. 또한 여러 복합적인 기능을 수용한 장소이기도 했다. 시를 짓고 학문을 노하며 사색에 잠기던 곳이었고 때로 연회를 열고 활쏘기 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왕이 참관한 가운데 군사훈련도 행해졌고 왕고 왕비가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일반관람에서는 후원중 일부인 부용지, 애련지까지만 볼 수 있다. ㅇ 부용정과 부용지
ㅇ 주합루 주합루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 작은 어수문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ㅇ ㅇ 영화당 앞뜰인 춘당대에서 열리는 문무의 과거를 임금이 직접 주관하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 걸려있는 현판은 영조가 직접 쓴것이라고 한다.
ㅇ 애련지와 애련정 순조의 맏아들이 효명세자(1809~1830)는 총명하고 인품이 높아 18세에 순조를 대리하여 정치를 지휘하다 22세로 요절한 왕자였다. 이곳에는 숙종 대에 건립한 애련정이 있었고, 효명세자는 1827년부터 여러 시설물을 세워 새로운 정원을 만들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치를 구상했다. 그가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던 의두합은 단청을 하지 않아 단촐하고 소박하며, 또한 독서와 사색을 위하여 궁궐 내 유일한 북향 건물로 되어 있다. 단칸의 애련정 역시 작지만 애련지 연못에 반쯤 걸친 모습은 경쾌하며 정자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절경을 이룬다.
ㅇ 연경당 원래 이집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아버지인 순조의 덕을 칭송하기 위한 존호를 올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순조 28년(1828) 지어 졌다. 이 집은 대궐에 있으면서도 단청이 되어 있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로 남녀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 집을 연상시킨다.
창덕궁은 안내인의 말에 따르면 가을에 단풍이 아름답다고 한다. 가을단풍이 물들때 미리 자유관람으로 예약을 하면 아주 아름다운 궁궐을 볼수 있을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딸래미도 가을에 다시 오겠다고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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