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 최종 결과와 마지막을 표방한 황우석 교수의 기자회견이 연이어 나오고 며칠이 지났다. 반전을 거듭하는 황우석 사태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이제 검찰로 향하고, 널뛰기 보도에 치이는 시민들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다. 충분한 공부를 바탕으로 취재하기보다 발생하는 사안에 쉽게 매몰되는 언론은 진실보다 선정성에 무게를 싣기 때문이다. 천성산과 새만금과 평택 대추리에서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거의 듣지 못한 시민들은 테라토마와 디엔에이핑거프린트도 알고 배반포가 무언지 짐작하지만, 배아줄기세포를 둘러싼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야흐로 백가쟁명의 광장이 열렸나. 신문과 텔레비전은 황우석 사태를 둘러싼 논자들의 분석을 쏟아낸다. 조사위원회의 발표를 듣자니 드러나는 실상이 생각보다 추악해 보통 시민들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논자들은 어떨까. 사태의 원인과 진단을 현학 또는 교훈적으로 전해주는 다양한 논평들, 하지만 마지막 논점은 한결같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발맞춘 것일까. 반성은커녕 해명조차 하지 않은 과학기술부는 주제를 망각한 채, 황우석 교수에겐 매를, 줄기세포 연구에는 지원을 다짐하고 나선다.
아직 세계 최고의 기술을 선점하고 있으므로 생명공학에 대한 투자는 계속, 또는 더욱 강화해 환자맞춤형배아줄기세포를 우리가 확립해야 할까. 그 줄기세포는 생명공학자들이 장담하는 대로 불치병과 난치병을 발본색원하며 반도체 이후의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먹여살릴까. 원천기술을 확보하기만 하면 이동전화 분야에 세계적 거부가 된 퀄컴처럼 우린 로열티 받는 부자나라로 등극할까. 30억년 이상 이어온 생명은 연구자가 만들지 않았는데, 생명현상은 기계동작이나 화학반응처럼 예측가능하지 않아 원천기술을 적용해도 쉽게 재현되지 않는데, 배아를 죽여서 얻을 환자맞춤형배아줄기세포는 과연 정당할까.
수많은 약속과 장담이 거짓으로 드러난 이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연구자들이 숨겼던 목소리를 내고, “결과를 중시하는 결과지상주의가 사회전체를 압도하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잊어서 발생한 일”을 함께 반성하자는 주문이 나온다. 하지만 반성다운 반성은 드물다. 국익이 진실보다 중요하다던 기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다시 속아보자던 경기도지사와 확실하게 밀어주겠다던 대통령은 왜 침묵하는가. 청와대의 황금박쥐는 어영부영 멸종되었나. MBC PD수첩에 욕설하던 네티즌, 신문사설로 황우석 교수를 감싸던 논설인들, 정치자금 받으며 후원을 약속했던 국회의원들, 왜 아무 말이 없나.
곤혹스럽다는 경우도 있는데, 차라리 부끄러워야 한다.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으며 논문의 윤리와 진위를 의심한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붓지 않았던가. 그들은 공개적으로 반성해야 한다. 그래야 제 양심에 대해 빚을 갚는 것이다. 차제에, 자신도 속았다면 왜 속았는지, 어떻게 해야 다시는 속지 않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나아가, 자신을 속인 문제의 연구는 타당하고 필요한 것인지, 필요하다면 어떻게 지원해야 좋은지, 관련 제도에 수정이 필요하다면 무슨 절차를 거쳐야 할지, 민주적이며 투명할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빛 잃은 황우석 교수에 대한 철지난 백가쟁명 말고, 우리 사회에서 문제의 근본을 묻는 논의나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은 현재 이렇다하게 강구되지 않는다. 조급한 성과주의를 탓하는 목소리는 나오지만, 성과주의의 원인은 무엇인지, 성과주의를 불식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뚜렷하지 않다. 배아줄기세포 연구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하는 논자들은 황우석 교수가 아니라도 국가부가가치를 드높일 연구자가 많아 다행이란다. 다른 나라가 추월할 수 있으니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말자는 발언에 힘이 실리는데 제2의 황우석은, 제2의 논문사기는 발생하지 않을까.
환자맞춤형줄기세포라, 누가 환자 맞춤형이라고 정의하나.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사람이 그렇게 규정하면 다 따라야 하나. 황우석 교수는 배아줄기세포만 조작한 게 아니다. 환자맞춤형이라는 신화도 날조했다. 안정적이지 않아 어떤 세포조직으로 분화할지 모르고, 일단 분화해도 나중에 엉뚱한 세포조직으로 변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배아줄기세포는 암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고 관련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지적한다. 환자의 체세포를 복제해 배아줄기세포를 확립하면 맞춤형일까. 아니다. 환자의 몸에 그 줄기세포를 넣으면 큰일 난다.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른다. 뜻하지 않은 암이 체내에서 테라토마처럼 발생할지 모른다.
연구를 거듭하면 배아줄기세포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연구자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장담할수록 거액의 연구비가 보장될 것이므로. 하지만 아직 확신하기 이르다. 해마다 수 십 억 달러를 퍼붓는 암 연구의 결과도 기대처럼 획기적이지 않다. 연구가 일천한 배아줄기세포의 가능성은 암 연구보다 나을까. 확실한 것은 연구자들에게 연구비 풍년이 한동안 계속되리라는 전망일 것이다. 약삭빠른 기업은 배아줄기세포에 연구비를 투자하지 않는다. 연구비는 오직 세금이다.
배아줄기세포의 안정성 연구를 위해 난자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이 드물다. 얼마나 파괴할지 모를 난자를 황우석 교수에게 더 제공해 배아줄기세포를 재현할 기회를 주자는 일부 시민과 불교계의 목소리와 관계없이, 안정성은 불임클리닉에 냉동보관된 수정란으로 확보한 배아줄기세포주로 얼마든지 연구할 수 있다. 배아줄기세포주를 연구 희망자에게 분양하면 된다. 민간난자기증재단이 나설 것도, 연구자들이 진달래를 즈려밟을 이유도 없다. 기존 배아줄기세포주로 안정성을 확보했다면 환자맞춤형배아줄기세포는 당장 유용해질까. 아니다. 장기은행에서 환자와 맞는 장기를 찾듯, 냉동배아를 활용한 줄기세포주를 충분히 보관한다면 배아를 복제할 필요가 없다. 참고로, 우리나라 불일클리닉의 냉동배아 보관량은 가히 세계 최대다.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 사회에 성체줄기세포의 가능성이 부각되지 않는다. 럭비공처럼 불안한 배아줄기세포와 달리 임상 적용이 추진될 정도로 안정성이 있을 뿐 아니라 분화 폭이 꽤 다양한 까닭에 많은 국가에서 상당한 연구비를 투자한다고 한다. 그만큼 특허도 많이 선점했을 것이다. 배아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아 윤리적 문제가 작은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성체줄기세포도 나중에 암으로 변한다고 한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성체줄기세포 역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세포치료가 가능해진다면 줄기세포는 획기적일까. 거액의 치료비가 예상된다는 비판은 접어두고, 불치병과 난치병을 말끔히 치료할 수 있다면 인류는 행복해질까. 척수환자가 일어나고 당뇨병이 치료되면 사회는 건강해질까. 척수환자나 당뇨병환자를 치료하지 말자는 의미가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척수환자의 완치를 의료보험으로 보장하는 사회가 되면 교통사고나 작업장사고에 대한 경각심은 줄어들고, 보험 가입을 못하는 계층은 불안과 위화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줄기세포로 각종 암을 치료할 수 있다면 어떤 사회가 도래될까. 치매나 발기부전과 같은 퇴행성질환을 치료해 거리에 젊은 오빠와 젊은 누나가 넘쳐난다면 수명이 연장될 사회는 행복에 겨울까. 다행일까. 줄기세포로 치료 가능할 것으로 점치는 분야는 젊은 척수환자 이외에 드물다.
노화는 과정이지 치료해야 할 질병이 아니다. 노화가 늦게 진행되는 세상을 위한 사회적 노력이 무엇보다 요긴하다. 젊은이의 퇴행성질환은 환경과 음식의 질을 개선해 발생 자체를 줄여야 옳다. 작업장과 교통환경 개선을 통해 척수장애의 발생을 근본적으로 막아야 하고, 발생한 장애인은 편의시설을 갖춘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 불치병과 난치병이 발생하는 환경을 개선하려 않고, 그래서 발생하는 환자를 수선하듯 치료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다 할 수 없다. 안정성에 대한 근거도 없이 치료가 곧 가능할 것처럼 과장해온 황우석 교수의 일련의 행동과 발언은 날조된 신화로 이어졌다.
황우석 교수의 잘잘못은 검찰수사로 확실히 드러날 것이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차분하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낙태가 거의 자유롭고 불임클리닉의 난자채취가 지나친 우리 사회의 생명윤리의식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배아 생명의 지위를 다시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 공명심을 앞세우는 연구자의 ‘인위적 실수’를 자정할 수 있도록 기관윤리위원회와 연구진실성위원회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생사여탈권을 쥔 제왕적 지도교수의 지시에 복종해야 하는 분위기를 민주적으로 개선하고 자유로운 토론문화를 실험실에 정착해야 한다.
인문사회를 모르는 과학자가 과학기술 정책결정을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문사회가 적절히 통제해야 과학기술은 안전하다. 그를 위해 인문사회 전공자도 과학기술을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학의 교양교육을 강화해야 하지만 우선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인문계와 이공계로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 칸트를 모르는 과학자와 열역학법칙에 무관심한 인문계는 일찌감치 소통이 차단되고, 통제를 모르는 과학기술은 비윤리성을 넘어 위험할 수 있다. 이번 논란에서 주은 어설픈 생명공학 상식은 과학기술의 홍보에 쉽게 현혹될 수 있다. 시민에게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시민단체의 역할이 중요했건만 미흡했다. 종교계도 문제의식을 신자들에게 전달하는데 소극적이었다. 이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1999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줄기세포에 대한 합의회의를 개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충분히 논의한 보통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한 적 있다. 당시 충실한 상식을 갖춘 시민들은 배아복제를 분명히 반대한 바 있다. 그 합의회의에 전문가로 참석해 시민들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던 황우석 교수는 씻지 못할 불명예로 과학자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결과다. 이제라도 우리는 허위로 형성된 줄기세포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으로 행복한 내일은 줄기세포보다 건강한 환경에서 온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시민의신문, 200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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