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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걸어서 국토종단 -9일차(광주-장성)

by 수레의산 2019. 3. 5.

(2019. 3. 5.(화)

  지난번 오른쪽 발가락 물집때문에 중간에 집으로 돌아갔다가 3월4일 다시 광주로 향했다. 충주에서 11:41분 기차로 오송까지, 오송에서 부터 KTX타고 광주 오송역에서 내렸다. 오는길에 광주 지하철을 타고 김대중 컨벤션역에서 내려 518자유공원을 들러 전두환과 그 똘마니들의 잔학상을 보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고개역에서 하차하여 택시로 지난번 중단했던 광주 남구청까지 왔다.

  5.18자유공원가기


그리고 국토종단 9일차를 시작한다. 오늘의  일정은

   08시에 출발이다. 오늘따라 미세먼지가 장난이 아니다. 아주 나쁨수준이다. 황사마스크를 쓰면 답답하지만 할수없다. 하루종일 밖에서 걸어야 하는데 그나마 마스크라도 해야 괜찮겠지. 투덜거리며 걷는다. 어제 내렸던 돌고개역도 지나고, 예술고교차로까지 오니 09:51분이다. 산동교를 건너면서 부터 시가지는 한산해 지고, 주로 가구단지들이 들어서 있다. 비아동에 들러 '유정식당'에서 생고기 비빔밥을 먹었다. 이 식당은 혼자 먹을 수 있는게 생고기 비빔밥과 익은고기 비빔밥, 그리고 된장찌개가 된다고 한다. 정육점까지 하는 집이라 생고기 비빔밥도 하는가 보다.


















 12시에 다시 출발.  비아중앙로를 타고 가다보니 끝에가서 길이 없어졌다. 할수 없이 1번국도로 내려갔다가 다시 못재로를 타고 걷는다. 길옆에는 한창 농사준비가 벌어진다. 길옆의 매실나무는 꽃이 활짝 피었고, 감나무, 배나무등은 모두 전지를 깔끔하게 마쳤다. 어느새 길은 장성군으로 접어들었다. 장성군 남면을 지나 잠시 휴식. 승강장에 보니 장선군의 지도가 있는데. 필암서원과 동학혁명 황룡전적지를 보기로 나혼자 결정했다.











  장성군은 다른 곳 보다 사람에게 많이 투자하는 듯 하다. 각종 사회복지시설이 큼직큼직 하게 서 있다. 특히 장성군 공공실버주택이라는 '누리타운'이 멋있어 보였다. 내가 숙소로 정한 모텔이 장성읍 끝쪽에 있기에 시내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걸었다. 발바닥이 꽤 아프다. 모텔에 체크인 하고(모텔 프론트에 식빵을 서비스로 제공하고 있다)







▲ 여기는 항아리 전시장이 아니고 음식점이던가?





▲ 이렇게 사람에게 예산을 쓰는것 좋다.



  배낭을 벗어 던진후 필암서원을 가기는 가야겠는데 좀 엄두가 안난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거금 6,800원이 넘는 돈을 내고 갔다. 필암서원은 선조23년(1590년)에 하서 김인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장성읍 기산리에 세워졌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인조2년(1624년)에 다시 황룡면 증산동 마을에 다시 지었다. 현종3년(1662년) 현종임금이 '필암서원' 이라고 쓴 현편을 내려 주었단다. 그후 1672년 큰 물난리가 나서 현재 위치로 다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서원의 입구는 '확연루' 라고 이름 지어졌는데 글씨는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뭐 크게 잘쓴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청절당. 동.서재와 경장각, 우동사라는 사당이 있다.


  선조와 인조...  이분들이 나는 조선의 임금 중에서 가장 멍청한 왕이었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을 당한 선조나, 그 처절했던 과거를 잊어 버리고 다시 정묘호란과 정유재란을 맞은 인조나 다 멍청하다. 그 옆에 커다란 한옥건물이 있기에 무엇인가 하고 보니 장성군 평생학습관과 김인후 유물전시관인데 유물 전시관 관람료가 520원인가 한다. 공짜라도 볼까 말까 한데 돈을? 




▲ 저게 '확' 자 라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때 욕심이 생겨 그냥 숙소로 돌아 왔어야 했는데 못참고 동학혁명 황룡전적지를 들러 돌아가기로 하고 열심히 걸었다. 별로 안멀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가깝지도 않은것 같다. 황룡전적지는 축창을 형상화 해서 세워 놓았다. 이곳 황룡전적지는 고종31년(1894)반봉건.반외세 정신으로 일어선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경관군에게 승리한  곳이란다. 황룡전투는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고창, 영광, 함평을 차례로 점령한 후, 전라도의 수도이자 이씨왕조의 태생지인 전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이학승이 이끄는 경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던 전투장이었다고 한다. 농민군들은 대나무로 엮은 발 안에 짚을 가득채워 이를 굴리면서 엄폐물로 사용하여 경군들이 쓰는 승총의 탄알을 피했다고 한다.








▲ 축창을 형상화 했다.


  돌아오는 길은 엄청나게 멀었다. 내가 지쳐있기에 더욱 그랬겠지만... 이곳도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 한옥마을은 모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다. 이렇게 높으면 웃풍이 좀 있을듯 한데. 건축비도 꽤나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전라도는 왜 이렇게 했을까?   너무 많이 걸어서 발바닥에 불이 나는듯 하다. 인근의 중국음식점에 들러 자장면으로 저녁을 때웠다. 첫날 이러면 곤란한데... 오늘 이동한 거리는 36.9km다




▲ 전남은 돈이 많은가? 과연 저런 고래광실 같은 기와집이 예전에 흔했을까?